인생잡담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14. 순례자들에게 뿌리는 공짜 와인? 이라체(Irache)

Ken. 2024. 6. 1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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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자길이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는 무슨 게임처럼 매일 새로운 이벤트가 있다는 것이다. 에스테야(Estella)의 알베르게에서 맞이한 아침도 그렇게 시작했다.

 

에스테야에서 로스아르코스까지

노래로 시작한 에스테야의 아침

2008년 6월 29일, 일요일이라 특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벽 6시 알베르게에 노래가 울려 퍼졌다.

 

에스테야의 알베르게에서 보이는 풍경

사람들은 대부분 침대에서 누워서 노래를 들으며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노래가 다 끝나자 모두 침대 속에서 앙코르를 외치며 웃으며 일어났다. 별 거 아닌 노래 한 곡으로 기분 좋은 아침이 시작됐다.

 

식당에 모여서 빵과 과자, 우유나 커피 등을 마시면서 가볍게 아침 요기를 하고 일곱 시 무렵이 되자 모두 출발했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는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라는 곳으로, 나름 큰 동네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나 오늘 걷는 코스에는 제일 재미있는 곳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산티아고의 주점이라 불리는 '이라체(Irache)'다.

순례자에게 무한정 와인을 주는 곳, 이라체(Irache)

와인을 그냥 퍼준다는 소문 때문에 순례길에 오르기 전부터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곳이 바로 이라체(Irache)다.

 

코로나 당시에는 닫았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지금도 이라체에서는 와인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라체는 수도원이고 미사용 포도주를 생산하던 곳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옛날부터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던 풍습이 이어지면서 지금은 와인생산업체가 이를 이어받아 누구나 와인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원래 소문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 퍼진다. 이라체를 몰랐던 사람들도 알베르게에서 소문을 듣고 들리는 경우도 많다. 이라체에서는 와인을 공짜로 제공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24시간 열어두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너무 일찍 가도 문이 닫혀있다고 하고, 너무 늦게 가면 떨어져서 잠가놓는다고 한다. 그래서 와인을 마셔야 된다고 일찍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라체는 에스테야에서 1시간 정도면 걸어가면 도착한다. 와인이 기다린다는 희망찬 발걸음으로 걷다 보면 금세 도착한다.

이라체 인근은 이런 포도밭의 연속이다. 저 뒤로 보이는 녹색이 대부분 포도나무다. 이라체에서 와인을 공짜로 퍼주는(?)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저 왼쪽의 건물이 와인을 저장하는 저장고다. 그리고 저 왼쪽 건물의 하단에 이 수도꼭지가 붙어 있다.

이것이 바로 이라체의 성스러운 와인샘이다. 왼쪽 수도꼭지가 와인(VINO)고, 오른쪽 수도꼭지가 물(AGUA)다. 왼쪽 수도꼭지 주변을 자세히 보면 와인이 말라붙은 흔적을 볼 수 있다.

 

누구나 편하게 마시라고 되어 있지만, 오른쪽에 붉은 경고판도 있다. 술이니까 18세 미만은 와인을 가져가지 말라고. 동네 사람들이 와서 먹진 않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이 주변은 사실 순례객 말고는 방문하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곳이긴 하다.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물통에는 물을 채웠고, 페트병을 하나 비워서 와인을 채웠다. 이 당시만 해도 술을 잘 마시지 않아서, 저 300ml 정도면 충분했다.

2008년엔 사람도 거의 없어서 혼자 여유롭게 와인을 따라서 출발했다. 와인의 맛은 평범했지만, 순례자들에게 주는 와인이란 의미에서 괜히 맛있게 느껴진다. 저 와인은 계속 들고 다니면서 저녁을 먹으며 홀짝홀짝 마시곤 했다.

 

이라체에도 이와 같은 오랜 건물들이 많다. 성 같아 보이기도 하고, 성당 같기도 하다. 이 사진을 찍은 뒤부터는 꽤나 고행길이 시작된다. 그늘이 없는 평지길이다.

 

사람들의 쉼터로 쓰던 건물인지 모를 여러 건물들을 지난다. 로스 아르코스까지 이런 길이 반복되는데, 숲도 거의 없는 평지다. 햇빛을 피할 데가 없어서 실시간으로 살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팜플로나를 빠져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막과 비슷한 '메세타 지대'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사막성 기후는 에스테야를 지나면서부터 점점 확실해진다. 길은 나름대로 평지지만, 뜨거운 태양을 피할 곳이 없는 사막 같은 곳이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이런 길을 계속 걷다가 큰 나무나 숲이 나오면 바로 쉬는 시간이다.

 

건조한 기후 때문에 햇빛은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지만, 그늘에 앉으면 견딜만한 더위다. 잠시 쉴 때 다리를 보니 실시간으로 타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다리에도 조금씩 선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화려한 로스 아르코스의 성당

오후 2시가 좀 넘어서 해가 가장 뜨거울 무렵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했다.

 

이곳의 알베르게에서는 한 일본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2년 전 팜플로나에서 산티아고까지 다녀왔고, 지금은 생 장 피에드 뽀흐에서부터 걸어가기 시작하여 이곳, 로스 아르코스에서 자원봉사로 며칠 있는다고 했다.

 

아직 스페인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영어로만 떠들던 나에게 일본어로 떠들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좋았다. 그녀도 영어나 스페인어만 하다가 일본어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 당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순례자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매일의 일상이 '눈뜨고 걷기' 뿐이지만, 세상의 시계는 그렇지 않다. 이 날은 일요일이라 상가 대부분이 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바에서 저녁을 먹고서, 성당의 미사에 따라가 보았다.

 

로스 아르코스의 성당은 굉장히 화려했다.

천주교인이 아니라서 성당을 잘 모르지만, 내부 장식의 화려함은 누가 보아도 알만한 정도였다. 온통 금박과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성당 내부는 어두웠지만 밝게 빛났다.

 

 

엄청난 규모의 파이프오르간도 있었고, 각종 조형물들이 화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자 길에서 만나게 되는 대형 성당들이 몇 군데 있는데, 그런 대도시의 성당 못지않은 웅장함과 화려함이 있었다.

 

지금이야 주변 도시들(팜플로나, 로그로뇨, 바르셀로나)의 규모 때문에 밀려난 것이겠지만, 로스 아르코스 역시 '잘 나갔던'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성당이었다.

 

 

교인이 아니더라도, 순례자로 미사에 참석하면 편안한 휴식이 되는 기분이다. 더운 열기에 걷다가 시원한 성당 내부에 앉아서 여러 이야기를 듣다 보면 기분도 좋아진다. 원래 미사는 스페인어와 라틴어로 진행하지만, 순례자 길에는 외국인들이 많다 보니 순례자 미사 시간이 별도로 되어 있는 경우에는 영어미사가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는 같이 걷는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도 되니 참석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순례자 미사까지 다 끝나도 해가 아직 떠 있다. 보통 9시가 넘어야 해가 정말 저물었다. 

순례자 길에서 만난 형과 함께 알베르게에서 와인을 한 잔 마시면서 마르고 있는 빨래를 구경하는 게 평범한 하루의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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