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잡담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15. 한국음식을 해먹는 날

Ken. 2024. 6. 13. 14:02
반응형

2008년 6월 30일, 로스 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Logroño)까지 걸어간 날이다.

 

아침 일찍 달리자: 7시 20분 출발

산티아고 순례길은 정말 덥다. 6월 중순부터는 해가 정말 뜨겁게 내리쬐고, 기온은 약 30도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습도가 낮은 사막 같은 곳이라서 해가 지면 기온이 뚝 떨어진다. 밤이 되면 살짝 춥다고 느껴질 정도다.

 

해가 가장 강해지는 12시부터 2시에 걷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매일 조금이라도 더 일찍 출발하게 되었다. 아침 7시 20분에 준비를 다 마치고 다음 도시인 로그로뇨로 출발했다.

 

길은 아스팔트와 흙길을 넘나든다. 신나게 걸으며 가다 보면 작은 마을을 여러 개 지난다.

 

오래된 건물들이 유지되고 있는 작은 마을들을 지나다 보면, 책에서나 볼 것 같은 광경이라 신비로울 때가 있다. 내가 순례길을 걷고 있는 중세시대의 순례자란 생각도 가끔 하게 된다.

 

에우나테(Eunate)와 같은 모양의 성당들도 계속 나타난다. 에우나테는 정말 초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이런 성당들은 한참 뒤에 그 형태를 본떠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12. 바람과 용서의 언덕 페르돈, 12세기 성당 에우나테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12. 바람과 용서의 언덕 페르돈, 12세기 성당 에우나테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의 사진에 등장하는 몇 가지 명소들이 있다. 초반 일정에 꼭 등장하는 명소가 바로 '페르돈 언덕'이다. 이 페르돈 언덕을 넘으며 가기 위해, 이 날은 좀 많이 걸었다. 구글

lotusken.tistory.com

 

가끔은 앞에 남은 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이런 길을 보고 있으면 몇 백 년 전 사람들도 이 길을 따라 걸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지평선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아무리 멀리 보아도 바다나 산이 보이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땅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순례자의 가방에는 순례자의 상징 조개껍질을 달고 간다. 조개껍질이 달려 있으면, 사람들도 인사를 건네준다.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 남짓이 된 시점에, 내 발목에는 진한 선이 생겼다.

 

해를 등지고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종아리 뒤쪽으로 천천히 익었다. 양말을 올린 지점까지만 하얗고, 그 위로는 새까맣다. 선크림을 바르며 구운(?) 다리라서 색도 참 고르게 잘 익었다. 이 여행이 모두 끝나고 두 달이 더 지나서야 이 흔적이 좀 사라졌다.

 

아침 일찍부터 걷는다고 해도 덥고 힘든 건 마찬가지. 마을 주변의 작은 공원이나 숲을 보면 주저앉아서 이것저것 챙겨 먹으며 쉰다.

빵과 치즈, 과일을 먹는 식사가 거의 일상이 된다. 와인도 가끔 곁들인다.

 

첫날부터 함께 걷고 있던 멕시코 가족이 같은 곳에서 쉬다 보니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아래 글에 등장하는 작은 사진이 이 가족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9.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9. 첫 날, 피레네 산맥을 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는 첫날은 제일 힘든 날이다. 몸이 아직 덜 풀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코스가 좀 힘들기 때문이다.산티아고 순례길 첫 날 아침 식사 - 따뜻한 음료와 빵 몇

lotusken.tistory.com

 

멕시코에서 온 이 가족은 아빠와 엄마 그리고 세 자녀가 함께 걷고 있었다. 아빠는 저 캐리어를 끌고 다녔고, 모두가 가방 하나 싹을 메고 있었다. 엄마는 온 가족이 먹을 음식들을 준비하고 쉴 때마다 먹이고 있었다.

 

물론 애들은 너무 덥고 지겹고 힘들어 보였지만, 그것마저도 재미있어 보였다. 나중에 10년쯤 뒤에 저 기억이 얼마나 즐거울까.

 

오후 2시 로그로뇨 입성

오후 2시 정도까지 신나게 걷다 보니 로그로뇨에 입성했다.

가기로 마음먹은 동네의 이정표가 보이면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이 정도를 걷다 보면 스페인어도 대충 읽을 수 있게 된다. 스페인어를 읽는 것 자체가 그다지 어려운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로그로뇨도 나름 큰 동네라서 이 알베르게에선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바로 한국음식 먹기다.

알베르게에서의 요리

알베르게는 보통 저녁을 제공하지 않는다. 부엌을 제공하는 곳들은 있다. 주변에서 식사를 사 먹어도 되지만, 알베르게에서 요리를 해 먹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경험이다.

 

보통은 간단한 요리를 해 먹는 곳이기 때문에 대단한 요리를 할 수는 없지만 전자레인지와 잘 조합한다면 괜찮은 만찬을 즐길 수 있다.

 

우선 이 날은 요리를 해 먹기 위해 주변 시장에서 적당한 재료들을 찾아봤다. 한국 요리가 살짝 그리워지던 시점이라 한국 스타일 요리를 찾아봤지만 2008년의 스페인에는 그런 게 없었다. 지금이라면 한국 음식재료들을 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구글링을 해보니, 중국인 상점에 들린다면 한국 재료들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마트'같은 곳을 찾아서 구한 것은 다름 아닌 라면이다. 그것도 한국라면은 아니고, 동남아시아계 라면이었다. 한국의 맛이 그리웠던 나는 아쉬운 대로 그 라면을 가지고 와서 숙소에서 끓였다. 김치처럼 냄새가 심한 것은 아니라 먹는 데 문제는 없었다.

레토르트 식품으로 판매하는 생선요리와 또르띠야(계란파이)를 가져와서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에 라면과 함께 먹기 시작했다. 밥이 조금 그리워서 숙소의 냉장고에 남아있는 쿠스쿠스를 함께 먹었다.

 

요리는 대단한 게 없었지만, 아시아의 라면 국물 맛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그동안 샐러드나 파스타만 즐기다가 먹는 라면의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나는 여기서 재미가 붙어서, 이후 알베르게에서 종종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참고로, 알베르게의 냉장고는 공용이다. 전날 먹을 것을 사놓고 남겨두고 간 사람들도 많아서, 그걸 먹기도 한다. 내가 산 것도 남기고 떠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도 여행 마지막 피니스테라에서 장을 잔뜩 봐두고 그냥 떠나온 적이 있었다.

 

 

이 로그로뇨부터는 행정구역이 '라 리오하(La Rioja)'로 바뀐다. 나중에 한국에 왔을 때도 스페인 와인에 쓰여 있는 '라 리오하'라는 말에 괜히 그리운 마음에 와인을 더 마시기도 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