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잡담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17. 순례자길 최고의 밤, 잊을 수 없는 그라뇽(Grañón)의 밤

Ken. 2024. 6. 17.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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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나헤라(Nájera)를 지나면, 또 만나게 되는 큰 도시인 산토도밍고 델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Calzada)에서 머물게 된다. 하지만 이곳 평판이 좋지 않아서 마을 하나만 더 걸어가자고 결심한 이 날, 나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밤을 보냈다.

 

 

나헤라에서 그라뇽까지 - 끊임없이 이어지는 벌판 

나헤라를 빠져나오고 산토도밍고 델라 칼사다까지 걸어가는 길은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구간이다.

 

하늘은 이렇게 멋있지만, 햇빛을 피할 곳이 하나도 없는 벌판이 계속된다.

 

저마다 가방에 구겨넣은 자신의 인생을 짊어지고 그냥 뚜벅뚜벅 걸어간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두 세시간 쯤 걷고 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계속해서 걸어간다.

조그마한 마을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잠깐의 짬을 내어 음료를 마시고서는 또다시 걷고 또 걷는다.

 

한참을 걷다가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가방에 넣어두었던 초콜릿을 꺼냈다.

내 발목은 저렇게 줄이 생기기 시작했고, 초콜릿은 뜨거운 태양볕에 시럽이 되었다가 굳기를 반복하면서 이런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초콜릿이 가방 속에서 녹을 수 있다는 것도 이때 처음 알았다.

 

다리가 시원해서 반바지를 입고 계속 걸었는데, 햇빛이 가장 많이 닿는 곳이 점차 까매지고 있었다. 갈색 스타킹을 신은 듯했다.

 

산토도밍고 델라 칼사다는 작은 마을 수준이 아닌, 조금 큰 도시다. 그런데 그만큼 순례자들이 중간기점으로 많이 몰리다 보니 시설이 낙후되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몸이 힘들지만, 그래도 한 마을만 더 가보자는 생각이 들게 된 이유는 알베르게에 변기 커버마저 없다는 말을 듣고 난 뒤였다.

 

산토도밍고 델라 칼사다를 지나서 바로 나오는 마을에 머물기로 결심한 나는 조금 더 힘을 냈다. 그러자 정말 작고 단출한 마을인 그라뇽이 나타났다.

 

우연이 가져온 축복, 그라뇽

그라뇽에도 알베르게는 있었다. 다름 아닌 마을의 성당건물이었다.

 

성당의 건물에는 뒤쪽 입구로 관리하던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다락이 순례자들의 숙소로 활용되고 있었다.

 

종탑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자그마한 숙소 공간이 나온다. 

 

모두의 신발은 잠시 이곳에 벗어두고 들어간다.

종탑을 끝까지 올라가면, 자그마한 이 마을을 내려다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종탑 옆에 빨래를 말리기도 한다.

 

알베르게로 들어가면 나오는 곳은 예쁘장한 거실이다.

 

마치 동화책에 나올 것 같은 예쁜 거실이다. 이 거실의 뒤로는 작은 부엌과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다락이 있는데, 저 다락이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침실이다.

 

예쁘장한 거실에 비해 침실은 매우 열악하다. 

한국의 찜질방 정도의 얄팍한 패드가 여러 개 놓여있을 뿐이고,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누워있을 수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식사 때문이다. 순례객들은 이곳에 도착한 뒤, 잠시 휴식을 취하고서 7시 무렵에 미사를 본다. 그리고 8시부터 식사가 시작되는데, 이곳의 식사는 순례객들이 직접 준비한다.

 

하루 종일 걸어왔던 사람들이 자원봉사로 음식을 만들어서 스스로 차려먹는 것이 이 알베르게의 전통이다.

 

다 같이 식사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디서 왔는지, 왜 걷고 있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다들 처음 만나지만, 각자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너무나도 재밌다.

 

이 날의 식사는 이탈리아에서 걸어온 한 할머니의 까르보나라와 폴란드에서 걸어온 팀이 만들어 준 샐러드였다. 이 두 사람의 손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 특별한 맛이 있었다.

모두가 둘러앉아서 음식을 받고, 이야기를 나누며 몇 시간 동안을 떠들었다. 오가며 서로 얼굴을 보던 사람들이라, 이 기회에 서로 궁금한 점을 물어보며 시끌벅적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식사를 대접받은 뭉클함이 있었다. 좁은 부엌이라 몇 사람 들어가지도 못하지만, 조금이라도 갚아보려고 설거지를 하러 달려들었다. 옷이 다 젖도록 설거지를 하고 나오자 수고했다고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진심으로 참여한 순례자 모임

식사를 마치자 밤 10시에는 모두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순례자 기도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식사 전에 있었던 미사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다 같이 밥을 지어먹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니 더욱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미사의 성격이 다른 때와 달리, 여기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미사의 마무리로 이 길을 걷는 서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진심으로 서로의 안전을 기원하고, 길에서 자신이 원하던 의미를 찾기를 바란다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힘들게 걷는 시간을 보내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들의 말 하나하나가 감동적으로 들렸다. 서로를 포옹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서로를 끌어안으니 눈물이 왈칵 솟아났다.

 

나는 천주교인이 아니라서 미사에 특별한 의미를 두진 않지만, 이 날의 미사와 기도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할 만큼 진심을 다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참여했다.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나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곳이 바로 이 그라뇽이다. 사람들과 허물없이 밥을 지어먹으며 이야기를 하던 기억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함께 미사에 참여했던 기억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기도 모임을 마치고 밖에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모두 들어가질 않았다. 쌀쌀한 밤바람을 즐기며 여운을 즐기던 이 날 밤을 잊을 수 없다.

 

정해진 스케줄이라는 것을 벗어나, 우연히 도착한 마을에서 이런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다는 게 더없이 좋은 기억이었다.

 

산티아고 순례자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그라뇽의 미사에서 신부님이 진행했던 영어미사는 독특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우리는 서쪽으로, 해가 지는 방향으로 즉,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뒤로 돌아서 다시 생명의 길로 걸어갑니다. 거기엔 당신의 용기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 메시지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언젠가는 모두가 각자의 산티아고에 도착을 하겠지만, 모두가 안전하게 도달하길 기원했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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