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잡담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18. 산신령 할아버지를 만난 날 - 사설 알베르게, 일반적인 알베르게 요금제도

Ken. 2024. 6. 2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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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3일, 그라뇽(Grañon)에서의 아침을 맞이했다.

 

간밤에 이야기를 하다 친해진 사람들과 이별을 하며, 명함을 주고받기도 했다. 여행이 끝나서 자기네 동네로 오면 꼭 연락하라면서 출발을 했다. 

 

그라뇽에서 에스피노사 델 까미노까지

그라뇽에서 너무 즐거운 밤을 보내다 보니 감동을 하며 다음 날 길을 시작했다.

마음이 즐겁다고 해서 길이 다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늘 없는 사막이나 다름 없는 길을 끝없이 걸어가게 되어있고, 누적된 피로가 조금씩 나를 흔들기 시작한다.

 

발에 물집이 잡히기도 하고, 물집을 터뜨리면 얼얼해서 걷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쯤에서 내가 깨달았던 사실은, 자기 발에 적당한 텐션이 있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걸어보겠다고 신발끈을 꽉 죄어버리면, 오히려 발 근육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막아서 발에 통증이 왔다. 오래 걷기 위해서는 발이 적당하게 '헛돌지 않도록' 잡아주는 정도의 텐션이면 충분했다.

 

나는 신발끈을 오히려 느슨하게 풀고, 편하게 걷기 시작하면서 발에서 오는 통증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576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을 만나기도 했다. 이 표지판은 숙소 주인이 만든 일종의 광고판(?)이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즐거운 순간들도 분명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만나게 되는 동료들이다.

 

서로 얼굴도 익숙해지고, 묵었던 알베르게 이야기도 하면서 함께 걷는다.

 

영어가 되는만큼 서로 대화를 하고, 안되면 프랑스어로도 하고, 중간에 있는 사람이 서로를 통역해주기도 하면서 짧은 대화들을 이어간다.

 

알베르게가 꽉 차면, 다음 마을로

이 날은 가볍게 걷기 위해 토산토스(Tosantos)라는 마을까지 걷기로 했다.

 

중간에 만나는 벨로라도(Belorado)라는 마을에서 편하게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 먹고, 점심도 먹으며 천천히 걸어갔는데, 토산토스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알베르게가 꽉 찼다는 것이다.

 

알베르게도 무한정 사람들을 담아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제한인원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솔루션이 두 가지 있다.

  1. 일반 호텔을 포함한 사설 알베르게를 이용하는 것
  2. 전 마을 혹은 다음 마을로 이동하는 것

아주 작은 마을에도 공립 알베르게를 제외하고 한 두 개가 더 있는 게 보통이다. 특히나 마을 주민들이 재빠르게 집을 개조하여 숙소로 만든 경우도 있다. 호텔을 포함한 이런 사설 알베르게를 이용한다는 것은 요금이 비싸진다는 단점이 있다.

 

공립 알베르게가 평균 5유로 정도의 요금이라면, 사설 알베르게와 호텔은 기본 10유로를 넘어간다. 물론 더 좋은 호텔을 이용할 경우 가격은 더 올라간다.

 

대신에 장점도 분명 있다. 요금이 비싸진 대신, 시설이 조금 더 쾌적하고 좋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순례길 초반에 머물렀던 하쿠에 호텔도 맛있는 식사를 제공했기 때문에, 방문할 가치는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12. 바람과 용서의 언덕 페르돈, 12세기 성당 에우나 테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12. 바람과 용서의 언덕 페르돈, 12세기 성당 에우나테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의 사진에 등장하는 몇 가지 명소들이 있다. 초반 일정에 꼭 등장하는 명소가 바로 '페르돈 언덕'이다. 이 페르돈 언덕을 넘으며 가기 위해, 이 날은 좀 많이 걸었다. 구글

lotusken.tistory.com

 

전 마을로 돌아가거나, 다음 마을로 이동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진 않다. 우선 예전 마을로 간다는 것은 그보다 더 뒤에서 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힘들다. 게다가 순례길을 걸으면서 다시 '돌아간다는 것'도 심리적인 장벽이 높다.

 

그래서 보통 다음 마을로 이동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다만, 로그로뇨를 지나기 시작해야 마을 간의 간격이 짧아진다. 약 1-2km 내외로 마을 간격이 짧아져야 걸어서 조금 더 걸을 여력이 있다. 마을 간격이 너무 길다면 이 방법도 어렵다.

이 날, 토산토스의 숙소가 꽉 차자, 주변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누군가는 더 가기로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주변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가기도 했다. 사진 속의 두 사람도 다음 숙소 정보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벨로라도 의 알베르게는 이처럼 '수영장도 있다'라고 광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산토스에서 만실을 경험한 나는 이 광고가 너무 그리웠다.

 

그러다 결국 마을 하나를 더 걷게 되었고, 그 뒤로 나타난 작은 마을에서 신기한 알베르게를 만나게 되었다.

 

산신령 알베르게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나는 이곳을 계속 산신령의 알베르게라고 불렀다. 

 

평범하게 길에서 볼 수 있는 집이었지만, 알베르게라고 쓰여 있는 글을 보고 다가가니 주인아저씨가 나타났다.

 

산타클로스 같은 할아버지가 요금을 설명해 주며 방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식사를 포함하여 14유로를 받는 곳이었다. 14유로라는 가격이 사실 큰돈은 아니지만, 당시 알베르게 가격치고는 좀 비싼 편이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을 하다 더 이상 다음 마을로 가기엔 지쳐서 들어갔다. 들어간 이 집안의 분위기는 예상 밖이었다.

온 집안이 이처럼 정갈하게 정리가 된 상태로, 마치 박물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숙소는 2층이었고, 씻고 내려와서 저녁을 먹는 시간까지 계속 집을 구경하게 되었다.

 

여러 기념물들과 산티아고의 역사를 설명하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어서 밥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마치 공부를 하는 느낌이었다.

 

본인의 수집품을 이처럼 진열장에 넣어서 전시를 해두니 흡사 갤러리에 온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8시 무렵에는 주인아저씨가 차리는 저녁식사가 있었다.

 

뒤로 도착한 독일인 부부와 프랑스 부부, 그리고 스페인 자매까지 10명이 모여 앉아서, 주인 아저씨가 직접 만든 빠에야와 샐러드 그리고 타르트를 먹었다.

주인 아저씨가 만든 음식의 맛도 너무 좋았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도 너무나 즐거웠다.

 

지금은 구글에 검색을 해봐도 이 알베르게가 나오진 않는다. 지금까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2014년의 로드뷰로는 건물은 있지만, 알베르게 표시는 보이질 않는다.

 

 

나는 지금도 이 집을 산신령 알베르게라고 부른다. 그 어디에도 소개되어 있진 않았지만, 마치 산신령처럼 음식과 힐링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순례길을 방문한다면, 이런 사설 알베르게를 만나보는 것도 재미있는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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