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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20. 노숙 아닌 노숙? 산 안톤의 폐성당에서 잠을 청하다

Ken. 2024. 6. 2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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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더 많은 시간을 쉬자, 몸은 훨씬 가벼워졌다. 그래서 이 날은 아예 걷는 데에만 집중해서 계속해서 걸었다.

 

새벽부터 저녁 5시까지, 잠깐 밥을 먹는 시간만 빼고 계속 걸었던 것 같다.

 

2008년 7월 5일, 이 날은 폐성당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다.

 

부르고스의 끝자락에 있는 대학교

메세타 고원을 지나는 고행

이 지역부터는 대부분 메세타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대단하게 높이 올라가진 않지만, 올라가서 한참을 걷다 내려오고, 또다시 올라가는 형태다.

 

체력소모가 상당히 심한 구간이 되기 때문에,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걷는 게 좋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좀 든든하게 하는 게 필요하다.

아침식사(Desayuno)라고 써있는 식당에 가면 이런 아침식사를 판매했다. 샌드위치(Bocadillo)와 또르띠야(Tortilla), 음료 등을 포함한 식사 메뉴다. 특히 저 스페인 또르띠야는 정말 맛있게 잘 먹고 다녔다.

 

 

걷는 데만 집중하다보니, 어떤 동네를 지났는지도 가물가물 하다. 사진에는 이런 건물도 찍어두었지만, 솔직히 어딘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길 위에는 아기자기한 성당들이 많다. 기회가 된다면 다 들어가 보고 싶기도 하지만, 신자가 아니라서 쉽사리 시도해보진 못했다.

 

 

고원을 따라 걷다보면 이런 황량한 풍경들이 많이 보인다. 하염없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생각도 다 끊어지고 걷는 명상을 하는 기분이 든다.

 

 

하늘은 이처럼 흐렸다가 맑아지기도 하고, 다시 또 흐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은 거의 없었다.

 

이 와중에 또 다시 조그만 시골마을인 온타나스(Hontanas)라는 곳에 도착했다.

 

오래된 시골마을이었고, 풍광도 마치 옛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마을에도 작은 알베르게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한 한국인 모녀를 마주쳤다. 이 분들은 여기서 쉬기로 했다고 하고 휴식을 취하고 계셨다.

 

이 알베르게에 머물까? 고민하다, 이왕 걷기로 한 거 좀 더 걸어보자 생각하고 조금 더 걸어봤다.

 

 

뜨거운 해가 조금 가시고 나서 걷는 매력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서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해가 정면에서 내리쬔다는 문제가 있긴 했다. 그래서 조금 더 일찍 많이 걷는 게 좋았다.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의 산 안톤(San Antón) 폐성당

그렇게 조금씩 더 걷다보니, 어느덧 다섯 시까지 걷게 되었고 산 안톤 폐성당을 마주하게 되었다.

 

 

산 안톤 성당터는 그냥 멀리서 볼 땐 일반 성당인 줄 알았다.

몇 번 마주쳤던 성당 터처럼 보였기 때문에, 잠시 구경을 하고 알베르게를 찾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성당이 알베르게로 사용되고 있었다.

 

정말로 벽체가 무너지고, 천정도 없는 그런 성당이었다. 안쪽에는 천정이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이곳을 알베르게로 운영하였다.

 

꽤나 오래 걸은 나는 이 곳에 머물기로 하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침대는 총 12개 정도가 있었고, 침대에는 흙먼지가 있었다.

 

조명도 없고 어두침침한 곳이었지만, 의외로 씻는 곳은 바로 옆 건물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분이 상주하는 곳이었다.

 

 

건물도 낡아서 벽체만 간신히 견디고 있는 모양이지만, 운치가 있었다.

 

밤 10시 무렵엔 해가 다 저물어서, 사진도 찍기 어려웠지만, 어슴푸레 남아있는 빛으로 사진을 몇 개 건지긴 했다.

 

사람들은 이 곳에 알베르게가 있는 줄도 사실 잘 몰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말 우연하게 도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날에는 몇 번 마주쳤던 스페인 자매들이 함께 했다.

 

재밌게도 저녁식사는 또 관리인 아저씨가 챙겨주셨다.

 

피자와 같은 음식을 내어주었고, 순례자들과 동네 사람 한 둘이 더 모여서 함께 촛불을 켜고 식사를 했다.

 

 

촛불만으로는 너무나 어두웠지만, 마치 100년쯤 전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식사를 즐겼다.

 

식사보다 더 즐거웠던 것은 사실 아저씨의 노래였다.

식사를 마치자, 옆에 있던 기타를 들고서 이런저런 노래들을 해주었다. 아마도 스페인의 옛날 노래들 같았다.

 

이 당시 아저씨가 부르던 노래는 영상으로 한 곡 남겼다.

 

https://youtu.be/uUmDRW2 y7 qo

 

 

기타 줄은 하나가 빠져 있어서, 소리도 제대로 맞지 않았지만 그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노래는 즐거웠고, 사람들과의 대화도 재미있었다.

산 안톤 폐성당의 여담

산 안톤의 폐성당에서 잠을 자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폐성당에서 잠을 자는 것은 재미있는 체험이긴 하다.

 

다만 이곳에서는 침대의 관리도 더 부족한 게 사실이기 때문에, 단순히 침낭이 아니라, 외투를 입고 자는 것이 더 나았다.

 

그리고 자는 동안 천정에서 흙이 조금씩 떨어지기도 했다. 건물이 무너질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약간의 우려는 있었다.

 

2024년 5월 현재에는 건물의 안전성 문제로 인해 잠시 닫아두었다는 말이 있다.

 

특이한 알베르게를 경험하고 싶다면, 한 번쯤 들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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