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대해서

팔대산인과 같은 한 획, 소산 박대성

Ken. 2024. 7. 23.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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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유명한 화가였던 '팔대산인'이라는 사람이 있다. 중국의 왕족 출신인 청나라 초기 승려이자 화가였던 인물이다. 그의 그림은 단순하면서도 힘 있는 필체로 그려진 그림들이 많았다. 군더더기가 없는 자유로운 그림을 그리는 그는 신선이라 불리기도 했다. 

팔대산인의 팔팔조도

한국의 한 화가의 그림을 보다보면 팔대산인이 떠오를 때가 있다. 바로 소산 박대성이다.

한국 수묵화의 거장, 소산 박대성

삼릉비경, 2017

박대성 선생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한국화 같지 않다"라는 생각이 든다. 먹과 색이라는 한국화 특유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엄청난 스케일로 나타나기 때문에 큰 에너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위의 삼릉비경도 실제 사이즈는 4m x 8m에 이르는 대작이다.

물론 그의 작품이 예전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상림, 1979, 박대성의 국선 수상작

1979년 박대성 화백은 위의 작품 <상림> 으로 국선을 수상했다. 물론 이 그림을 보면 '잘 그렸다'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지금 소산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림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그의 생각이 아직 많을 때란 것이다. 그의 스타일이 묻어나지만, 작품에는 자잘한 선이 많이 남아있는 그림이다.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하다.

우리에게 빈 종이가 하나 주어진다면 과연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나라면 아마도 무언가를 채워넣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상태로, 자꾸만 쓸데없는 색을 채워가는 데 집중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게 보통 사람들일 것이다.

어느 빈 종이에 채워지는 그림의 시작과 끝은 모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결정한다. 그래서 어디까지 채워야 할지, 어느 만큼 만을 채울지도 모두 그의 역량에 달린다. 고민을 많이 하는 만큼 붓은 흔들리지만, 그 누구도 채울 것과 비울 것을 결정해주지 않는다. 오로지 나 자신과의 대화만이 그 결정을 내릴 뿐이다.

박대성 선생의 초기작을 보면 그런 고민이 느껴진다. 채우려고 하고, 완성하려고 한다.

그러던 그의 작품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한국적인 것을 버리고, 형태를 버리고, 구도를 버린다. 눈에 보이는 것을 해체하고, 또다시 만들어내고, 그 속에 다른 것을 넣어본다.

불밝힘굴, 박대성

그러면서 그의 그림은 점차 그만의 스타일로 정착하기 시작한다. 더 줄어들고, 더 줄어든다. 그래서 최소한의 터치로, 최대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가 그리는 작품들에서 팔대산인이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완성을 위해 더 손을 대야 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더 손댈 필요가 없는 작품에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미, 2021

2021년 가나아트에서 전시했던 작품들인 '고미'와 '금강산' 등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금강산, 2021

작품 <고미>와 같은 기물을 그릴 때에는 질박함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리고 <금강산>과 같은 풍경에서는 그림을 보는 구석구석을 따라가며 보는 맛이 생긴다.

그림의 시작과 끝에서 모두 소산 박대성이 느껴진다. 어떻게 그림을 마무리해야하는지를 알고, 한 단계를 넘어선 느낌이다. 그의 작품은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선이다. 그리고 그 선이 나오기 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담겨있는지 보이는 묵직한 획이다.

수묵화의 거장인 박대성의 작품은 보면 볼 수록 빠져드는 그런 매력이 있다. 거대한 화폭을 따라 거닐면서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박대성 선생의 머릿속에서 함께 뛰노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그림은 가나 아트갤러리나 경주의 솔거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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