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잡담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12. 바람과 용서의 언덕 페르돈, 12세기 성당 에우나테

Ken. 2024. 6. 9.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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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의 사진에 등장하는 몇 가지 명소들이 있다. 초반 일정에 꼭 등장하는 명소가 바로 '페르돈 언덕'이다. 이 페르돈 언덕을 넘으며 가기 위해, 이 날은 좀 많이 걸었다.

 

구글에 검색하면 거리가 이렇게 나오지만, 사실 페르돈 언덕을 넘어서 우테르가(Uterga)까지는 직선거리에 있다. 그래서 시간은 조금 더 짧은 편이다.

새로 정비를 하고 떠난 팜플로나

2008년 6월 27일, 평소 같았으면 새벽 여섯 시 무렵에 이미 준비하고 출발했겠지만, 이 날은 좀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캐나다로 돌아가는 친구를 배웅하면서 신발도 새로 사야 했다. 그래서 여덟 시가 되어서야 느긋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온 스테판과, 프랑스에서 온 마쥬는 며칠 같이 걸으며 친해진 친구들이다. 그러나 이 날을 마지막으로 일정이 꼬이며 다시 볼 수는 없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친구들도 산티아고 끝까지 갔던 걸로 기억한다.

 

캐나다 친구도 버스정류장으로 배웅하고서, 나는 신발을 새로 샀다. 알베르게에 도착한 뒤 신을 슬리퍼도 하나 사고, 걷기에 좋은 짧은 등산화도 하나 구했다. 당시 등산화에 관심이 많아서, 이리저리 비교하며 기능이 좋은 신발을 찾았다.

 

그리고 전에 신었던 나이키 운동화는 버리고 거기 신발끈만 빼서 가방에 챙겼다. 땅끝에 도착하면 자기가 입고 온 곳과 신발을 태운다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중에 신발끈만이라도 태우려고 따로 챙겼다.

 

 

새 등산화를 신고 걷기 시작하자, 발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리고 이 신발은 10년을 더 신고 2023년에서야 수명을 다했다.

 

나는 늦은 시간을 만회하려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곧 팜플로나 도심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안녕 팜플로나!

 

마을 곳곳에 걸려있는 황소 그림들의 배웅을 받으며, 팜플로나 시내를 벗어났다.

 

팜플로나의 외곽부터는 이런 공원을 가로지르는 길도 있었다. 동네 주민들이 산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 낮에 걷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나 나처럼 대부분 순례자들이었다.

 

도심을 빠져나간다고 느낀 것은, 잘 정돈된 공원들을 지나가면서 점차 높은 건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산후아니타 교회'가 보이면, 팜플로나를 다 빠져나온 셈이다.

정확하게는 종파가 조금 다르다고 하는데, 몰타 교단에 속한 교회라고 한다. 물론 종교적인 순례자들에겐 중요한 곳이기도 하겠지만, 일반 순례자들에게는 지나가며 구경해 볼 수 있는 오래된 건물이다. 이 옆에는 대학교가 함께 있다. 대학생들의 생활도 멀리서 볼 수 있다. 물론 6월 하순 무렵은 여기도 방학이다.

 

이곳을 지나가고 나면, 다시 외곽의 비포장길이 나오기 시작한다.

 

저 멀리 보이는 산까지 이런 자갈길을 주야장천 걸어가기 시작한다.

 

 

이 사진부터는 풍력발전기가 조금 잘 보이는데, 저 언덕을 넘어가야 오늘의 코스가 끝나게 된다. 이 날은 내가 조금 천천히 출발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벌판 너머로는 이름모를 폐성당들과 건물들이 숲에 뒤덮여 있기도 했다.

 

5-600년 전이었다면 이 길을 따라 혼자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 순례자가 아니라면, 그저 적국을 염탐하러 온 스파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래서 성당이나 알베르게에서 이들을 보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 초조한 마음에 속도를 올려서 가다 보니 느긋하게 순례를 즐기고 있는 부부를 만났다. 카를로스(Carlos)와 메르세데스(Mercedez)는 마드리드에서 여름을 맞이해 순례를 시작한 부부였다. 멀리 한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순례를 마치고 마드리드에 오면 연락하라며 명함을 줬다. 아주 가끔 연말이 되면 이들에게서 연하장 메일이 오기도 한다. 길에서 만난 인연을 허투루 하지 않는 이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용서를 비는 언덕, 페르돈

길을 따라 계속 걷다보면 날씨가 분명 맑지만, 언덕을 오르면서 바람이 거세짐을 느꼈다. 풍력발전기를 괜히 세운 곳은 아닌 거 같았다.

언덕길을 오르며 주변을 돌아보면, 이처럼 탁 트여 있어서 눈에 걸리는 산이 하나도 없다. 저 멀리에 가물가물하게 보일 뿐이다. 그래서 바람은 점점 강해진다. 언덕을 한참 오르다 보면 돌풍에 가까운 바람이 분다. 풀이 눕는 바람이 불고 있어도, 해가 워낙 뜨겁다 보니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긴 한다.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다보니 언덕 저 멀리로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언덕의 정점에 도달하자, 이런 조형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을 헤치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상징한 조형물, 바로 페르돈 언덕의 기념물이었다.

 

 

이 언덕은 스페인 중심부(마드리드)로 향하는 길이기도 했을 것이고, 중간에 쉬어가는 곳이 되기도 했을 터. 이곳의 이름인 '페르돈(Perdon)'은 영어로 Pardon에 해당하는 양해, 용서와 똑같은 단어다. 그래서 이 언덕을 한글로는 '용서의 언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당시에는 의미를 몰랐지만, 이 언덕에서 용서를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워낙 경치가 좋아서 순례자들이 꼭 사진을 남기는 곳이다.

물론 나도 못 참고 사진을 남겼다.

 

사람들은 여기에 서서 잠시 쉬기도 했고, 기도를 하기도 했고, 용서를 빌기도 했다. 왜 이 곳이 용서의 언덕일까 싶었는데, 순례길에 올라서 다 내려놓고 며칠을 걷다 보면, 용서하지 못할 게 없긴 하다. 그래서 용서의 언덕에 도달했다는 핑계로 '용서를 해보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물론 여기 도착하면 그 핑계로 자기가 미워했던 모두를 용서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이 언덕에서의 장관은 바로 끝없이 펼쳐지는 이베리아 반도다.

차로 올라오는 현지 사람들도 있지만, 걸어 올라와서 이 풍경을 바라보는 나처럼 이곳을 아름답다고 느끼진 않을 거다.

오래된 12세기 로마네스크 성당, 에우나테

이 언덕을 지나 원래 목적지로 계속 향하기 위해서는 계속 길을 따라 직진하면 된다. 그러나 알베르게에서 사람들에게 들은 정보가 있어서 잠시 길을 우회하기로 했다. 바로 '에우나테(Eunate)'라는 건물을 보기 위해서였다.

 

페르돈 언덕을 내려온 뒤, 우테르가(Uterga)까지 지나고 나면  '에우나테(Eunate)'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일반인들은 잘 가진 않지만, 종교적 순례자들은 이곳을 일부러 가기도 한다고 들었다.

 

이 곳을 가라고 했던 건, 다른 유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정말 오래된 건물이기 때문이었다. 구글링 해보니, 지금은 입장료를 받는다고 하는 것 같은데, 2008년에 입장료를 받는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재도 성당으로 사용하는 성당으로, 주변 마을 사람들이 오는 곳이었다.

에우나테의 내부는 이처럼 잘 단장되어 있었다.

이 당시에 아무도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나는 성당 회랑의 밖에 앉아서 바람을 쐬며 휴식을 취했다. 12세기 건물이라면 천 년에 가까운 건물이다. 이 건물에 앉아서 바람을 쐬며 쉬어볼 수 있다는 건 어쩌면 대단한 영광이었다.

 

순례길을 따르는 도중에 다른 곳을 우회한다는 것은 사실 짜증 나는 일이다. 안 그래도 체력도 부족한 판에, 거리가 더 늘어난다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재미있는 공간에 앉아서 잠시 쉬어볼 수 있다면, 잠깐 옆으로 빠지는 것쯤이야 별 것 아니다.

 

건물은 아담하고 예쁘다. 성당을 빠져나와 걸어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며 사진을 찍었다.

 

 

건축에 대한 지식이 1도 없었지만, 에우나테(Eunate)에 들어가 보고 12세기의 건물과 호흡을 하고 왔다는 건, 지금에도 너무나 좋은 기억이다. 나중에 또 이 길을 걷게 되더라도 에우나 테는 들려보고 싶다.

 

 

에우나테에서 다시 원래 순례길로 돌아와서, 오늘의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로 향했다. 푸엔테 라 레이나 마을에 진입하는 입구에는 이런 오래된 성당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식 알베르게를 찾아가려면 여기서 20분가량은 더 걸어야 했지만, 바로 눈앞에 '알베르게'가 하나 나타났다. 바로 하쿠에(Jakue)라는 호텔이었다.

 

이 호텔도 나름 도장을 찍어주면서 순례자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조금 방 값은 비쌌지만, 저녁식사를 순례자 뷔페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르기로 했다. 도미토리가 아닌 일반 객실이었고, 코인세탁을 돌릴 수도 있어서 아주 좋았다.

 

지금 구글 리뷰로는 뷔페도 더 이상 제공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2008년의 기억은 너무 좋았다. 이 날의 좋은 기억 때문에 이후에도 사설 알베르게를 몇 번 이용하게 됐다. 일반 여행객들에겐 그다지 좋은 호텔은 아닐지라도, 2008년 순례자들에겐 아주 고마운 곳이었다.

 

심지어 저녁이 뷔페였기 때문에, 나는 공식 알베르게까지 찾아가서 거기 친구들에게 여기 순례자 식사 뷔페라고 하며 우르르 끌고 와서 다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와인도 무제한에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

 

참, 순례자들은 빨래를 어떻게 할까? 사진처럼 샤워를 하며 침대 프레임에 걸어서 밤새 말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2-3시쯤에 다음 숙소에 도착하기 때문에 보통은 저녁 무렵이 되면 빨래가 바짝 마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래가 다 마르지 않는다면? 이들처럼 가방에 빨래집게로 꽂아서 말리며 걷는다. 오전 한두 시간이면 빨래는 바짝 마른다. 나도 덜 마른 속옷을 매달고 걷기도 했다. 그리고 정신없이 걷는 동안, 어딘가로 날아가서 잊어버리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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