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잡담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9. 첫 날, 피레네 산맥을 넘다.

Ken. 2024. 6. 9.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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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는 첫날은 제일 힘든 날이다. 몸이 아직 덜 풀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코스가 좀 힘들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첫 날 아침 식사 - 따뜻한 음료와 빵 몇 조각

2008년 6월 24일, 산티아고 순례길에 드디어 들어서는 날이었다.

 

새벽 6시가 좀 넘어가자, 알베르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어둑한 새벽이다보니 가방도 잘 보이지 않았다. 다들 일어난 거 같아서 '불을 켜도 되겠냐'라고 물었더니 모두 오케이를 했다.

 

불을 켜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같은 방에 배정 받았던 한 여성 순례객이 속옷만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방에서 놀란 건 나 밖에 없었다. 그 여성을 비롯해서 모두가 아무 의식 없이 편하게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날의 충격(?) 덕분에, 그 이후로는 나도 별 생각없이 다니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좀 놀랍긴 한 상황이었다.

 

알베르게마다 다르지만,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곳이 있고 아무 것도 없는 곳이 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2008년 생 장 피에드 보흐의 알베르게에서는 빵과 차를 아침으로 내어주었다.

 

식당에 들어가자 관리인 할머니가 묻는다. "Te? o Cafe? Cafe au Lait?(차? 아니면 커피? 우유 넣은 커피?)" 할머니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화가 난 것인가 싶지만, 그냥 잘 안들리셔서 그런 것 같았다. 프랑스어 단어가 좀 들린다 싶지만, 바로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넘어가기 때문에 이 이후부터는 스페인어를 하는 게 더 편하다.

 

할머니가 이야기하는 음료 중 하나를 고르면, 할머니가 따뜻하게 내어준다. 음료와 함께 탁자에 있는 빵을 먹으면 그걸로 아침식사는 끝이다.

 

아침을 먹고 나면 다들 지체없이 출발한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출발하는 게 제일 편하기 때문이다.

 

첫날의 일정 -  생쟝삐에드뽀흐(Saint Jean Pied de Port) ~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 약 25.7 km

 

첫날의 코스는 약 25.7km 정도가 되는 거리다. 사실 거리 자체는 그렇게 멀진 않다. 서울로 치면, 롯데월드가 있는 곳에서 홍대까지 걸어가는 정도의 거리다.

 

다만 이 날의 코스는 유럽과 이베리아 반도의 경계에 있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야 할 뿐이다.

 

구글지도에서는 약 7시간이 걸린다고 되어 있지만, 7시간에 가기가 쉽지 않은 거리다. 조금 쉬면서 가다 보면 10시간 정도 걸린다.

 

생 쟝 피에드 뽀흐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는 내리막이었지만, 곧바로 완만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는 천천히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된다.

 

게다가 안개가 낀 날이어서 걷기가 어려웠다. 안개가 갑자기 몰려들면 5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고, 옷도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처음 한 시간은 산책같던 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잠깐 안개가 개었을 때는 간신히 사진을 한 장 남겨볼 수 있었다.

 

한참 걷다보면 알베르게 'Orisson'이 나타난다. 지금 구글 지도에는 Refuge Orisson(오리손 대피소)라고 나와있지만, 2008년에는 이곳도 알베르게라고 했다. 

 

이 곳도 '사설 알베르게'로, 가격도 비싸지만 생 장 피에드 뽀흐에 일찍 도착한 사람들이 일정을 줄이려고 먼저 출발한 경우에 이곳에서 자는 경우들이 있었다. 산속에 있어서 조금 더 조용하다는 장점도 있고,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뒤쪽에 텐트에서 지내기도 해서 색다른 분위기가 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검색해보니 이 루트 상에 알베르게가 두 개쯤 더 보이지만, 2008년에는 오리손 밖에 없었다.

 

한참 산맥을 타고 오르다가 너무 지친다는 느낌이 나자 풀밭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10킬로가 넘는 가방을 메고 걷다 보니, 어깨 근육이 눌려서 아프기도 했다.

점심 메뉴는 전날 빵집에서 샀던 빵과 치즈 조금이다. 3-4시간 가량 걸은 뒤라 몸은 힘들지만 먹을게 잘 들어가진 않았다. 지금도 저 빵의 퍽퍽했던 식감이 기억난다. 살 거면 저런 빵 말고 샌드위치류를 사는 걸 추천한다.

 

안개를 헤치며 걸어가고, 또 걸어가다가 반짝 해가 나오면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졌다.

이런 풍경을 보는 순간에는 힘든 것도 잠깐 잊어버렸다. 무슨 동화책에나 나올 것 같은 풍경이었다. 사진에 보이는 저 두 사람도 전부 순례자들이다.

 

7시간쯤 걷자 밥을 먹은 힘도 점점 빠지는 듯했다. 조금씩 쉬는 타이밍도 짧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8시간쯤 걸었을까, 계속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는 기분이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숫자의 소 떼가 나타났다. 소에게 졸아서 사진도 남기질 못했는데, 그 소 옆으로 걸어가다 보니 '프랑스-스페인' 국경 표지가 있었다. 그곳이 산티아고 순례길 상에 있는 피레네 산맥 정점이었고, 그 곳을 기점으로 나는 스페인에 들어섰다.

 

그 지점 이후부터는 줄곧 내리막길로 바뀌었다. 거진 1시간 가량 내리막 길이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또다시 '탁 트이는' 순간이 생겼고, 그곳에 갑자기 'Roncesvalles(론세스바예스)'라는 표지가 나타났다.

 

그렇게 다음 마을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알베르게에 여유가 있어서, 도장을 받고 침대를 배정받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는 옛 성당을 새롭게 고친 곳이었다.

 

이 마을 또한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주 수입원(?)이다 보니, 성당과 관련된 구경거리가 많았다.

 

걸어다니는 내내 자주 보게 되는 성당의 메인 창문과 문 장식들도 오래된 맛이 있었다.

 

성당에서는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도 진행되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 7~8시 무렵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길에 있는 성당에서 꼭 보게 되는 '산티아고' 상이다. 성 야고보는 저렇게 모자와 지팡이, 조개껍질을 들고 있다.

 

 

이 건물이 순례자들이 머무는 알베르게다.

알베르게 내부의 모습은 이렇다. 조명도 옛날 촛대를 그대로 살려서 상당히 운치 있었다.

 

이 마을에는 순례자 식사가 있었다. 9유로였고, 파스타와 빵, 생선요리와 감자튀김, 그리고 와인을 곁들였고 요구르트를 후식으로 주었다.

 

알베르게 사용료는 6유로였다.

 

이렇게 첫날이 마무리되었다.

 

순례길은 대체 어떻게 찾는가?

순례자가 많이 있을 때는 그들을 따라가기만 해도 별 문제가 없지만, 혼자 걷게 되는 순간이 많을 때는 가끔 겁이 날 때가 있다. 내가 길을 잘 가고 있나 싶은 순간이다. 

 

그럴 때에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표식들이 있다.

 

공식적인 상징으로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만들어진 방향 표지들이 곳곳에 있고, 노란색 스프레이로 화살표가 표시된 경우도 있다.

 

이거 누가 장난친 거 아니야? 란 생각이 드는 불안한 표식도 있지만 그걸로 장난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커다란 표지석을 만나기도 한다.

 

위 사진은 첫날 여정에서 보았던 최초의 표지석이다. 앞으로 725km의 여정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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